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치호 일기 (문단 편집) == 설명 == 1883년 1월 1일부터 1887년 11월 24일까지는 [[한문]]으로 일기를 썼고[* 희한하게 1884년에는 처음으로 영어 문장으로 일기를 쓴 대목이 있는데, 하필이면 그 대목이 '''자기가 사귀던 기생 백씨와 드디어 [[성관계|정을 나눴다]]'''는 내용이다. 기록은 하고 싶은데 남이 볼까봐 의도적으로 영어로 써서 내용을 감춘 듯. accomplish라는 단어가 잘 안 외워졌는지 accoprish라고 잘못 썼던 것도 눈에 띈다. 여담으로 윤치호는 첫째 부인 강씨가 바람을 피우자 한동안 여러 기생과 지내다가, 이 백씨와는 꽤 진지한 사이가 되어 집안에 양해를 구하고 첩으로 들였다.], 1887년 11월 25일부터 1889년 12월 7일까지의 일기는 국문으로 썼으며, 1889년 12월 7일 이후의 일기는 영어로 썼다.[* 현장감을 담기 위해서인지, 일부 인물들의 말을 인용할 때는 한자를 섞은 [[근대 한국어]] 혹은 [[일본어]] 등으로 적기도 했다. 예를 들어, 궁궐 화재 당시 창덕궁으로 이어하기를 거부하던 고종황제의 말인 '나 죽거던 태자궁이나 데리고 가거라'라든가, [[을사조약]] 당시 박제순이 '다 잘 되었으니 인궤 들여보내시오'라고 재촉한 대목이나, [[고종(대한제국)|고종]]의 국장 당시 조선인들이 장례행렬을 보고도 모자를 벗지도 않고 애도를 표하지도 않는 일본인 구경꾼들을 보면서 '무에 조아 웃니(뭐가 좋아서 웃니)?'라고 야유하던 모습, 일본인들은 자기들끼리 '이렇게 늠름한 [[일본군|군인]]들을 보면 조선인들은 벌벌 떨 테지.'라며 자기들끼리 떠들던 모습 등이 기록되어 등이 있다.] 1908년부터 1915년까지 일기는 전해지지 않는데, 이는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아 수감되었다가 1915년에 가석방되는 과정에서 일제 당국에 압수된 후 분실된 걸로 추정된다. [[파일:external/nowon.newsk.com/201305052156.jpg]] 윤치호의 자필 영어 일기 원문[* 위 이미지는 1940년 8월 10일자 일기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0일, 토요일, 흐림, 무더위. 오전 10시 20분 기차로 경성을 떠나 송도에 갔다. 12시 30분쯤 도착하여, 곧장 고려병원으로 가서 알렌을 병문안했다. 로라의 말로는, 알렌이 간밤에 잠을 잘 자기는 했지만, 과민반응이 아주 심하더란다. 김병선 박사에게 물어보니, 이틀 전에 39.9도까지 올랐던 열이 오늘 아침에는 많이 가라앉아 37.5도로 내려갔단다. 4시 35분 기차를 타고 경성에 돌아왔다.(10th. Saturday. Cloudy. Heat. Left Seoul 10:20 a.m. for Song Do. Arriving there about 10:30 went straight to Koryu Hospital to see Allen. Laura told me that Allen had a good sleep last night but that he is very irritative. Dr. Kim Pyong Sun said the temperature which rose to 39.9 two days ago came down to 37.5 this morning. Returned to Seoul by 4:35 p.m. train.)"] 윤치호는 어학 실력이 매우 뛰어나 한국에서 제대로 영어를 배운 최초의 인물이다.[* [[보빙사]]가 미국으로 파견되기 전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보내는 국서를 영어로 번역한 사람이 윤치호였으며, [[갑신정변]]이 일어난 날인 [[우체국|우정총국]] 개국 연회에서도 영어 통역으로 합석해 있었다.] 그의 영어 일기를 보면 오늘날 미국인들이 봐도 어려워하는 [[라틴어]] 계열 고급 어휘를 매우 많이, 자유자재로 구사했음을 알 수 있다. 어휘뿐만 아니라 어법이나 문장 구성도 거의 완벽하다. 에모리 대학 재학 시절에는 그가 쓴 에세이를 교수가 영어 문어체 글쓰기의 모범 예시로 학생들에게 공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쉬운 점은 윤치호가 그의 천부적 어학 능력을 한국어를 위해 거의 활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다른 관점으로 보면 오히려 다행인 것이 친일파였지만 어학적 재능은 탁월했던 그가 번역 작업에 손을 대었으면 현대 한국어 어휘 대부분이 그가 만든 단어들로 구성되었을 것인데, 이러면 후세 입장에서는 싫어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금 앞선 시기 [[나쓰메 소세키]], [[후쿠자와 유키치]], 니시 아마네 등의 일본인 언어학자 및 번역가들이 만든 [[번역]] 한자어들이 바로바로 근대 일본어에 흡수되었고 다시 한국어, 중국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낭만'이라는 말은 나쓰메 소세키가 로망이라는 말을 번역할 일본어가 없어서 새로 만들어낸 한자어다.] 만약, 그가 이 시기에 서양의 대표적 저작들을 한국어로 옮기는 번역 작업을 거들어 주었다면 근대화 과정에서 독자적인 문어 전통을 어느 정도 쌓을 수 있었을 것이며 현대 한국어에 대한 일본어 영향이 꽤 줄었을 것이다. [[일본어 잔재론]]도 덜 나왔을 것이다. 윤치호의 일기 중 국문(한국어)으로 기록한 부분은 대체로 발음나는 대로 그냥 쓰면서도, [[과도교정]]으로 인해 [[아래아]]를 필요 이상으로 많이 사용했다. 이후 영어로 일기를 쓰면서도 영어 찬송가를 한국어로 번역해야 할 때는 '훌륭한 영어를 잘못된 조선어로 바꿔야 함이 고통스럽다'고 일기에 적기도 했다. 그는 조선에서의 [[타자기]] 수요가 없으리라고 염세적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자식들에게는 조선어 읽기와 쓰기를 가르쳐 다중언어 구사자로 자랄 수 있게 했고, 본인도 조선어 관련 세미나에 참석해 연사들의 강연을 청취하곤 했다. 여러 정황을 볼 때 윤치호는 한국어를 민족 교육의 중요한 수단으로 보고 본인도 적극 활용했을지언정, 한국어의 어법 체계를 다듬기 위해 본인이 연구하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한말 정치인으로서,[* 이 때 세계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는데 [[고종(대한제국)|고종]]이 결단력을 확실히 못내리고 우유부단하게 대처한다고 비판하였다.] [[일제강점기]] 개혁 운동가로서, [[친일파]]로서 자신의 매우 솔직한 생각을 숨김없이 터놓았고[* 윤치호 본인은 독립 협회 활동 전후 시기에 차라리 일본서 살고 싶다거나 조선은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게 더 나을거다 운운하는 글을 자기 일기에 적어놨다. 이 시기 윤치호 일기를 보면, 미국은 인종 차별하고 중국은 더럽고 조선은 중국보다 못한데 일본은 세계의 정원으로 가장 아름다운 낙원이다라고 칭송하고 있다. 윤치호 일기가 본격적으로 번역되면서 윤치호의 친일 협력 시기를 상당히 앞으로 당겨잡는 이들이 많아졌다. 다만 윤치호 일가가 상당히 행동을 조심하였으며, 윤치호의 행동이 전형적인 민족 계몽 운동에 닿아있어서 윤치호를 친일로 비판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불똥이 튀고, 무엇보다도 윤치호의 독립 협회 활동에서 친일적 요소를 찾으면 안그래도 깨끗하지 못한 독립 협회가 다시 또 까이게 된다라는 문제점이 있다. 그래서 친일 협력 시기를 쉽게 올려잡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당시 주변 환경에 대한 온갖 자잘한 내용들이 적혀있어 [[한국근현대사]]를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서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개인 회고록이 그렇듯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영국사]]와 서양 근현대사 전공인 박지향 [[서울대학교]] 교수가 이 일기를 통해 윤치호에 대한 수정론적 해석을 제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